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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썰 백업/합작

여름이었다.

W.범고래
 
 
*합작<여름이었다> 참가작입니다.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는 여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그르륵거리며 캐리어를 끄는소리가 아스팔트에 긁혀 울리고 혜지는 졸린 눈을 문질렀다. 뻑뻑한 눈꺼풀 너머로 간신히 타고 갈 고속버스가 보였고 그 안에 이미 탄채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고멤들이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는 것이 익숙한 몇몇만이 서서히 도착해오고 있는 고멤들을 도와 짐을 실을 뿐이었다. 서늘한 공기를 피해 고속버스에 들어선 혜지의 눈이 이순간만큼은 반짝거린다. 고속버스에서 앞자리를 타는 것은 어리석은 것, 그러나 이렇게봐도 저렇게봐도 나름꿀잼인간들이니 어딜타도 재미있긴하겠지만!! 그러나 혜지의 걸음은 비밀소녀와 하쿠가 있는 방향으로 곧장 향했다.
 
 
 
"비소언니!"
 
 
 
보조배터리로 충전중인 하쿠가 비밀소녀에게 기대어 잠들어있는 공간을 조심스럽게 지나가 곁에 앉은 혜지가 히죽, 비밀소녀를 향해 웃는다. 하쿠가 깨지않게 고개를 돌린 비밀소녀 역시 설렘가득 묻어나오는 혜지의 표정을 보고 빙긋 마주웃어주었고, 그들이 탄 버스는 그렇게 새벽을 달려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내리는 소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멤들 사이에서 마젠타와 검은색이 적절하고 모던하게 섞인 자신의 캐리어를 낚아챈 혜지가 후다닥 달려 왁굳형의 뒤를 쫓는다.
 
 
비행기에 오를 때에는 신발을 벗어야돼~. 캘리칼리의 농담에 피식 비웃으며 요새는 그거 다 구라인거 안다며 응수하는 히키킹, 천민들만 타는 비행기는 처음 타본다며 그런 희귀한 규칙도 있냐는 비즈니스 킴의 물음, 그런 것을 듣고는 히죽거리며 캘리칼리의 놀리기에 동참하는 뢴트게늄이 뒤에서 수런거렸고, 혜지는 그런 그들을 향해 요새 누가 수학여행으로 비행기 한번 안 타보냐며 비웃었다. 와중에 박사님은 정말 비행기 타면 신발을 벗어야 하냐고 물었고 융터르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신발이 아니라 가발이나 허리띠를 벗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정해주었다. 귀금속과 비행기의 양력에 대해서 설명하는 토론을 들으며 혜지는 한숨만 폭 내쉴뿐 훼방을 놓지는 않았다.
 
 
 
새하얗고, 집 한채만큼 커다란 비행기를 마주하고 모두의 눈이 반짝거린다. 계단이 내려오고, 세팅되어 있는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좀처럼 조용하지 않은 고멤들의 떠들석함도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의 차례에 맞게 조금은 빠듯한 계단을 오르고 드디어 탑승한 비행기의 내부는 좁고, 생각보다 답답했다. 형도 이 정도로 좁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소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숙소를 더 좋은 곳으로 예약해두었으니 이번만 참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형과 함께라면 암튼 지옥이라도 좋다는 고멤들은 상관하지 않고 제각기 자리를 잡아 잠시 멈추었던 농담따먹기를 다시 시작했고, 이번에는 속았다는 것을 알게되어 격노한 도파민 박사님과 그런 박사를 급하게 말리는 프리터와 곽춘식, 진심으로 그런 거짓말에 넘어갔냐며 황당해하는 융터르의 2라운드가 펼쳐졌다. 아주 그냥 개그코너가 따로없다며 웃어재끼는 고멤들을 두고 카메라를 켠 혜지가 불쑥 비밀소녀와 하쿠에게 고양이입을 하고 다가갔다.
 
 
사진찍자! 그쪽들에게 한 말이 아님에도 일단 사진찍자는 말에 일시적으로 포즈를 잡는 고멤들을 보고 빵터지는 것은 덤이었다. 떠들썩하게 한바탕을 하고 난 후 드디어 이륙준비를 한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혜지는 핸드폰을 들어올려 렌즈로 또렷하게 창너머를 찍는다. 비행기모드를 켜기 전 이륙준비를 한다고 자랑하는 인스타를 올리는 것도 깨알같이 잊지 않았다. 해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떠있어 환하게 밝아져있었고, 검은 아스팔트를 빛내며 또렷하게 노란 경계선을 비추었다. 천천히, 무거운 비행기의 바퀴가 굴러가고 차보다, 버스보다 더 느리게 창의 풍경이 바뀐다.
 
 
 
조금씩, 조금씩, 심장고동에 맞춰서 빨라지는 비행기가 마침내 아주 미세하게 떠오른다. 그 순간의 고양감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여행지에서 느낄 새로운 기분과 날씨 그리고 설렘이 먹먹하게 밀려들어오는 기분, 온몸의 힘이 모조리 심장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고 시야는 또렷하게 작아지는 건물들과 지형을 담았다. 하늘위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그녀의 생각보다 더 네모났고, 초록색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푸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솟아오른 산들 사이로 보이는 동네들과 도시들을 보며 혜지는 이곳으로 돌아올 때 볼 야경에 대해서 상상하며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설렘가득했고 귀가 조금 먹먹하여 아팠던 비행도 잠시,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환히 보이는 풍경에 혜지의 눈이 크게 뜨인다. 제주도 특유의 야자수와 함께 맞이하고 있는 공기는 떠나기 전의 공항보다 더욱 더웠고, 따듯해 방금 에어컨바람을 한껏 맞고 온 피부에는 약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지만 맴맴거리는 소리까지, 마치 여름이 한발자국 더 먼저 온 듯한 풍경과 이국적인 모습에 혜지의 기세가 한층 더욱 등등해졌다. 완벽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아, 네, 뭐.. 숙소랑 위치랑 다 디코로 보내드렸던대로고요. 어..음, 두개재~.
 
 
 
형의 멋쩍은 공지와 함께, 그들의 발걸음은 힘차게 공항을 떠나 펜션으로 향했다. 하늘은 높고 구름한점 없이 맑아 조금은 따갑게, 등과 목을 덥히며 송글하게 땀을 맺었다. 바람은 그늘 아래에서만 서늘하게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를 가라앉혀주는 딱 좋은 날이었다. 이 앞의 길들은 틀림없이 즐거울 것이었다, 그리고 쌓을 추억 또한 찬란할 예정이겠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기억이란 미화되기 마련이었고 추억이란 원래 아름답게만 간직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날을 추억으로 또다시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다시 한번 더 이렇게 즐거운 기억을 쌓을 순간이 올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여름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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