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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썰 백업/합작

[합작]오케스트라

W.범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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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위한 가장 위대한 광상곡을
"
 
 


 
도시라는 것은 본래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은 건물들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빽빽한 아파트들이라고 부를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 발을 딛고 서있는 것은 도시가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겠지만. 아쉽다는 듯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쳐다보는 녹안이 맑았다. 그래도 덕분에 부서진 건물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깨끗하고 온건한 햇빛을 보고있지 않은가. 손을 뻗어 눈에 아프게 박혀오는 햇빛을 가린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기는 맑고 매캐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이 얼마만에 보는 평화로운 모습인지.
 
 
 
부서진 콘크리트와 드러난 철골들이 휘어져있었고 그 위로는 이미 죽어스러진 괴물들의 시신과 그위에서 피어난 분홍빛 꽃, 보라색 꽃이 어우러져있었다. 간신히 보기 시작한 새파아란 하늘과 닮은 청색의 꽃도, 새하얀 구름을 그대로 빼앗아 풀밭에 던져놓은 듯한 구름꽃과 그것을 시샘하여 대신 주변을 차지한 은빛의 방울꽃과 연두색으로 청명하게 빛나고 있는 이파리들. 분홍색과 노란색. 언젠가 한번 다같이 여행을 가서 보았던 푸르런 에메랄드빛의 바다색을 닮은 작은 안개꽃이 모조리 어우러져 얼핏보면 가꾼 화단 같아보이기도 한, 기묘한 풍경. 부디 가는 길만큼은 평안하게 갔기를, 창에 꿰뚫린 괴물의 시신에 짧은 애도를 한 그의 다시 옮기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강 다리 아래 처박힌 전철, 그리고 그 안에 흥건하게 낀 녹색의 이끼와 정거장을 가득 뒤덮어 낡은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덩굴들, 나뭇잎들 하나하나가 스산하지만 따스하게 세계의 멸망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라면, 이미 멸망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미소지으며 알려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쨌거나 분명 이곳에서도 치열하게 싸우고, 또 이를 악문채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상처입혔겠지. 흘긋 시선을 돌린 그가 무심코 떠올린 생각 한번에 발걸음을 톡, 다시 옮기며 뢴트게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보면 돌무더기, 혹은 이끼로 뒤덮여버린 그저 무언가라고 생각하기에 쉬운 괴물들의 시신과 인간들의 시신이 뒤엉킨 작은 숲을 지나쳐 남은 생존자들을 찾아 시야를 바쁘게 움직이는 그였다. 이렇게나 빼곡하게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는 뜻은 결국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지났다는 흔적이자, 뚜렷한 증거였으니까.




그러니까- 본래대로라면 시멘트에 묻혀있어야할 건강한 나무가 저렇게나 우렁차게 자란 것도 도시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녹빛의 이파리와 커다랗게 벽을 채운 덩굴들도 이야기를 좀 다시 하자면 시간을 짚어돌아가야했다. 오래전, 진부하게 머리아플정도로 지긋한 역사책에 나올 정도로 오래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나름의 그래도 옛날, 평범했던 일상을 이어나가던 시민들 사이로 바이러스가 퍼진 것도 생존자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였다. 외국에서 발병하여 차단하기도 전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차단한 후에도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결국 종내에는 세계로 퍼져나갔던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였다.

 

 

 

그 바이러스는 사람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람의 골격을 바꾸고, 뇌를 잡아먹었으며 그들의 이성을 쥐고 흔들어 끝내 인간의 형상을 벗어던지게 만드는 끔찍한 화학물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이전에는 '괴물'이라고 불러 기피했고 도망쳤으며 조금이라도 다쳤거나 기침을 하는 기색이 보이면 누가 먼저랄 것없이 날세운 손가락을 들어 밖을 가리켜, 쫓아내곤 했었다. 그렇게나 사납게 굴었던 과거도 이제는 다 지난날이 되었지만. 그렇게 생명들이 죽어나가고 사그라들어 마침내 너무나도 늦게, 인간들을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더이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치 그동안 지독하게 괴롭혀왔던 대가라는 듯 자연은 싱그러운 빛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했다. 바다는 새카맣게 물들어 더이상 아름다운 초록빛과 푸른빛을 보여주지 않았고 하늘은 잿빛으로 뒤덮여 그 아래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절망적이었던 상황에 어떤 이들은 차라리 잘 되었다며 이참에 자연의 복수를 받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었고 어떻게서든 이전의 빛을 찾아오고자 과학자들을 닦달하는 쪽도 있었다. 결국 언제나처럼- 흔한 소설에서 보았고 또 여느 SF물에서나 나올법한, 그린듯한 분열이었다. 살아남는 것에 급급해 뿔뿔이 찢어지는 무리들과 서로를 의심하여 결국 없는 수를 더 줄이고자 악착같이 손가락을 세워 쫓아내고는 하던 사나운 입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란 참으로 예상할수 없을만큼 짐승같아지는 것이었다. 그래, 마치 한마리의 원숭이나 침팬지처럼, 차라리 그들은 사그라든 마지막 자연이라도 지키고자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니 그들보다도 못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다 한때였지만.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상황에 사람은 지쳐버리고만다. 솔직하게 말해서- 인류가 '노래'를 찾지 않았다면 이대로 세상은 멸망하고 인류라는 종도 사라져 마침내 지구는 그때서야 살아남은 남은 동물들과 종들을 위해 일말의 자비를 보이고, 그렇게 서서히 이전의 아름다운 푸른별로 돌아가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래, 노래. 회상을 이어하게 될때마다 뢴트게늄은 그를 떠올리며 입가에 웃음을 피어올렸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뻐지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할텐데, 무릎높이의 돌을 훌쩍 뛰어넘으며 뢴트게늄은 중얼거렸다. 사람이 없어진 이후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고 혼잣말이라도 하는 습관을 들인 것도 그의 충고였다.

 

 

 

W. 정확한 이름을 알고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풀네임이 제대로 밝혀지는 것을 굳이 바라지 않았기에 그들은 그렇게 줄여부르고는 했다. W는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정확한 상황파악으로 생명을 피어내는 방법을 찾아낸 최초의 발견자였다. 그것이 바로 노래, 절망적인 상황과 많은 것을 체념해버린 사람들이 이미 잊어버린 빛바래고 쓸모없는 유희였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웃으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조롱하다가도 그가 고개를 들어 진실을 증명했을때 벙찐 표정으로 마침내 사람들은 W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아주었다. 그렇게, 첫번째 베이스캠프가 탄생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첫번째 베이스캠프이자 본부를 '왁타버스'라고 칭하고 그들 중에서 노래를 부를 줄 알고 생명을 피어내는데에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나 능력을 타고난 사람을 따로 뽑아 그들을 따로 '멘토'라고 칭해 노래를 가르치게 해주었다. 멘토들 중에서도 또 남들과 달리 확연하게 차이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따로 '지휘자'로 뽑아 각자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잿빛으로 물들어진 세계를 다시 한번 녹색으로 물들이는 것에 일조하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다 이말이었다. 우쭐거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던 그가 돌부리에 걸려 잠시 휘청거린 것을 제외한다면, 제법 지휘자다운 모습은 있었다. 이를테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라던가 누가봐도 눈에 띄는 머리색이라던가. 그 이상은 찾기가 조금 어렵긴 했지만.

 

 

 

어쨌거나 본론은 결국 그가 왜 첫 베이스캠프를 나와 떠돌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오케스트라도 없었으면서. 이 부분에서 그는 조금 시무룩해하곤 했다. 그가 좋아하고 꽤 동경하고 있는 지휘자, 해루석 같은 경우 그는 자신의 목소리만으로도 반경 1m 내의 풀을 피워낼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그를 따르는 오케스트라들 역시 수준급의 실력자들이 있었으니까. 저음의 소리로 둔탁하지만 규칙적이고, 웅장한 느낌의 곡을 불러오는 카르나르 융터르도 있었다. 날카롭지만 한없이 튼튼한 음을 쌓아 올리는 히키킹도, 모두 각자의 오케스트라- 그러니까 음을 맞춰준다거나 악기를 만들어주는 자들을 일컬을수도 있겠다-가 있었다.

 

 

 

뢴트게늄, 멘토로써의 재능을 뒤늦게 발견하였다가 누구보다 일찍 지휘자가 된 그는 여태 그의 오케스트라 한번을 가지질 못했다. 덕분에 악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오케스트라만 찾아오라고 아주 기가막힌 악기를 만들어주겠노라고 벼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국 상황을 요약하자면-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찾기위해 떠돌고 있다는 셈이 되었다.

 

 

 

"내가 할수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래도 해봐야지. 나도 꼭 연주해보고 싶은 곡이 있다구!"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번쩍 치켜들고 당차게 말한 것치고는 다소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어쨌건 그는 다시금 자신감을 얻어 슬슬 풍성해지기 시작한 수풀을 밀어냈다. 마침내 푸르른 들판을 벗어나서 그는 경이로운 장면을 바라보았다. 3km? 아니, 5km반경의 거의 모든 땅이 완벽하게 숲의 모습과 들판의 모습을 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입을 벌리고 서있는 그의 뒤에서 자박거리며 흙밟는 소리가 들리고 나타난 것은 새하얀 백발을 살랑거리며 봄바람과 함께 등장한 수수께끼의 여인이었다.

 

 

 

저를 찾으셨나요? 맑게 울리는 목소리는 그 어느 잘난 악기사가 만들어낸 것보다 더 곱고, 깨끗한 소리였다. 멍하니 쳐다보던 것도 잠시 실례했다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뢴트게늄에게 여자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있다는 듯 능숙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기다려주었다. 제 이름은 아이네에요,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첫번째 베이스캠프의, 지휘자겠죠. 짐작하는 것마다 또렷하게 진실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정확했다. 뢴트게늄은 어리벙벙하게 상황정리하여 설득하려던 말을 집어치우고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애초에 현란한 말솜씨로 남을 꾀는 것보다는, 진심을 전하는 편이 그에게도 쉬운 설득방법이었으니까.

 

 

 

"제 이름은 뢴트게늄이에요, 짐작하셨다시피 지휘자가 맞아요. 그리고 부끄럽게도 오케스트라가 없구요. 아, 오케스트라는-"

 

 

 

설명을 이어하려는 그의 말을 손을 들어 부드럽게 끊은 아이네가 고개를 끄덕여 이미 알고있으니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말린다. 그 무리를.. 오케스트라..라고 부르고 있었군요. 근사한 이름이네요, 조곤조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내는 상냥함이 그의 마음에 쏙 든 뢴트게늄은 방긋 웃으며 손을 불쑥 내민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제 오케스트라가.. 되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 당차고 호기로운 제안에 아이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가, 그의 눈과 함께 번갈아 다시 살핀다.

 

 

그러지요, 이내 수월하게 나온 허락에 뛸듯이 기뻐하고는 그럼 다음 오케스트라를 모집하러 가자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뢴트게늄의 셔츠 뒷목을 잡으며 아이네는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거기 낭떠러지에요. 흐이약, 기묘한 소리와 함께 당겨진대로 나자빠진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아이네는 다시 우렁찬 기세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 자신이 만들어낸 아득한 평원을 지나 기꺼이, 잿빛으로 물들어진 콘트리트 더미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호기롭게 나선 그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그만큼이나 늘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남색의 머리카락 사이 드러나는 은근한 브릿지가 포인트였던 활기찬 릴파와 뭐가 되었건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오케스트라인지 모시깽이인지 되어주겠다며 징버거, 자기가 최고일텐데 굳이 다른 사람이 필요하겠냐며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가도 어느새 녹아들어 소소한 도움을 주는 능숙한 주르르와 칭찬만 해준다면 신이 나서 제대로 활약해주는 상냥하고 귀여운 고세구,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막내이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각성해버리는 비챤. 그렇게 여섯명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지고, 그들이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부터 넘어서, 다른 사람의 꿈이 되어주는 것도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W, 그대를 위한 가장 위대한 광상곡을 만들어낼거에요. 검게 죽어버렸음에도 아직 살아있는 이들을 대신하여 외쳐주듯 생생하게 빛나고 있는 별들이 박혀있는 하늘에 하얀 은하수 아래에서 다정하게 속삭이듯 약속하는 말을, 그녀들은 들었다. 기다려주세요, 금방 갈게요. 짧은 인사말로 마무리하고는 다시 벌러덩 누워 소리없이 잠들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그다웠지만. 그녀들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이상과 그가 꿈꾸고 있는 미래가, 그리고 그런 그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W에 대한 호의조차도 결국 마지막에는 삭막한 세상이 다시금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것에, 크게 일조할 것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꺼이 그를 위한 광상곡을 불러주리라고 마음을 먹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화려하고, 그 누구보다 웅장하게, 자신들을 믿고 데려가주기로 결정했던 그의 믿음에 보답하듯이 가장 위대해질 광상곡을 불러주리라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새근거리며 숨소리만 고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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